80만명의 프랑스인들이 알제리아에서 한꺼번에 대탈출한 사연
1962년 봄부터 여름까지 불과 몇달동안 지중해 바다에서는 수많은 여객선과 화물선에 몸을 싣고 고향 알제리아를 등진 80만 명의 프랑스 사람들이 알제리아를 떠나 지중해를 건너 프랑스로 탈출하는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알제리아는 지중해건너 아프리카에 있던 프랑스 식민지로 그당시 알제리아에 살던 프랑스계 인구 100만명의 80%에 해당하는 수치였습니다. 이들의 이름은 "검은 발"을 뜻하는 피에 누아르(Pieds-Noirs)였습니다.
이들은 아프리카 알제리 땅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온 유럽인 정착민들이었으나 알제리아 독립과 함께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버리고 프랑스 본토로 떠나야 했습니다.
유럽인들이 어떻게 북아프리카 알제리아에 정착하여 번영을 누렸고 왜 피비린내 나는 전쟁 끝에 쫓겨나야 했으며 낯선 모국 프랑스에서 어떻게 다시 뿌리를 내렸는지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살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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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giers (Algeria 수도) |
1. 유럽인들의 알제리아 정착과 피에 누아르의 탄생
피에 누아르의 기원은 1830년 프랑스의 알제리아 무력 침략과 식민 지배에서 출발합니다.
프랑스는 알제리아를 단순한 해외 식민지가 아니라 프랑스 본토와 똑같은 정식 행정구역(데파르트망)으로 선포하고 대대적인 유럽인 이주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다양한 유럽국가 출신의 혼합 민족형성
알제리아로 건너간 이주민들은 프랑스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가난과 기아를 피해 지중해를 건너온 스페인인, 이탈리아인, 몰타인등 남유럽 각지의 빈민들이 프랑스 정부의 토지 무상분배 약속을 믿고 대거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은 현지에서 서로 통혼하고 프랑스 시민권을 얻으면서 프랑스어와 지중해식 생활습관이 결합한 독특한 유럽인 정착민 집단인 피에 누아르(black feet)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했습니다. 여기에 현지에 살던 토착 유대인들도 1870년 크레미외 법령에 의해 프랑스 시민권을 얻으며 이 공동체에 합류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프랑스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프랑스인으로서 살게 되었습니다.
검은 발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초기 정착민들이 진흙탕 개간지에서 검은 장화를 신었다는 설과 아프리카의 뜨거운 햇볕에 발이 그을렸다는 설 등 여러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2. 알제리아에서의 번영과 극심한 인종차별 구조
알제리아에 정착한 프랑스인들은 비옥한 해안가 평야를 독점하고 그곳에서 3~4대를 거쳐 포도농장과 올리브농장및 근대 상공업을 발전시키며 거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알제리아 수도 알지에의 아름다운 해변과 오랑 같은 대도시의 중심가는 파리의 거리와 다름없는 호화로운 유럽식 건축물들로 채워졌습니다.
그러나 이 번영의 이면에는 원주민인 알제리아 무슬림 아랍인들과 베르베르인들에 대한 가혹한 토지수탈과 차별이 깔려 있었습니다.
불평등한 신분제도: 인구의 약 10%에 불과했던 프랑스인들은 정식 프랑스 시민으로서 투표권과 막강한 정치적특권을 독점했습니다.
원주민의 2등국민 전락: 90%에 달하는 알제리아 무슬림 원주민들은 프랑스 시민의 자격을 얻지 못한채 프랑스인 농장의 소작농이나 도시의 하층노동자로 전락하여 극심한 빈곤과 억압에 시달렸습니다.
수 세대에 걸쳐 130년 넘게 살아온 프랑스인들에게 알제리아는 완벽한 자신들의 고향이자 조국이었으나 원주민들에게 그들은 토지를 빼앗아간 제국주의 침략자일 뿐이었습니다.
3. 알제리아 독립전쟁과 1962년 지중해 대탈출
1954년 마침내 알제리아 민족해방전선(FLN)이 무장 독립전쟁을 선포하면서 피비린내 나는 8년간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은 프랑스 정규군과 알제리아 독립군 사이의 전투를 넘어 민간인을 겨냥한 무차별 폭탄테러와 잔혹한 고문및 학살로 이어졌고 사람들은 지쳐갔습니다.
가방이냐 관짝이냐의 극단적 기로
1962년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8년간의 오랜 전쟁 끝에 결국 알제리아 독립세력과 에비앙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그 내용은 알제리아의 완전한 독립은 알제리아 국민들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국민투표를 통해서 결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피에 누아르 사회는 경악과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의 사유재산에 대하여는 재산권 인정과 철저한 보호를 약속했지만 프랑스인들은 보복을 두려워해 재산권을 포기하고 탈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려한 대로 재산권 인정에 대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무장 독립세력은 피에 누아르들에게 가방을 쌀 것인가 관짝에 들어갈 것인가(La valise ou le cercueil)를 선택하라며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그리하여 보복 학살의 공포 속에서 1962년 봄부터 여름까지 불과 서너달 사이에 약 80만명에 이르는 프랑스인 정착민들이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살고 있던 집, 농장, 가축과 평생 일군 재산을 모두 버려둔 채 가방 하나만 들고 항구와 공항으로 몰려들어 프랑스 본토로 향하는 배와 비행기에 필사적으로 몸을 실었습니다. 전체 프랑스인 인구의 거의 80%가 한꺼번에 증발하듯 알제리아를 떠난 20세기 역사상 유례없는 집단 엑소더스였습니다. 물론 나머지 프랑스인들도 수년에 걸쳐 알제리아를 떠났습니다.
4. 낯선 조국 프랑스에서의 냉대와 성공적인 재정착
피에 누아르들은 자신들이 구국의 영웅 대접을 받으며 프랑스로 귀환할 것이라 기대했으나 본토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었습니다.
본토인들의 냉대와 혐오: 오랜 전쟁으로 피로감에 지쳐 있던 프랑스 본토 시민들은 이들을 식민지에서 호의호식하다가 전쟁을 일으켜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흉이자 골칫거리 피난민으로 여겼습니다.
좌파 노조의 방해: 마르세유 항구에 도착했을 때 공산당 계열 노동조합원들은 배에서 짐을 내리는 것조차 거부하며 식민주의자들은 물러가라는 피켓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남프랑스 중심의 끈질긴 재기
알제리아를 떠난 프랑스인 3대, 4대 입장에서 보면 알제리는 그들이 나고 자란 고향이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그야말로 맨몸으로 프랑스땅에 도착하였고 정부의 지원금도 턱없이 부족했으나 피에 누아르들은 기후와 풍토가 고향 알제리아와 비슷한 마르세유, 니스, 툴루즈, 몽펠리에등 프랑스 남부지역에 자리를 잡고 정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들은 특유의 강인한 생존력과 결속력으로 과수 농업, 와인 생산, 소상공인 사업 등을 밑바닥부터 다시 일구어 냈습니다.
불과 한 세대 만에 남프랑스의 경제 지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으며 프랑스 사회의 유력한 경제인, 의사, 정치가로 대거 진출하는 놀라운 적응력을 발휘했습니다.
오늘날 피에 누아르 집단은 프랑스 우파 정치권의 매우 강력한 보수 표밭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잃어버린 고향 알제리아에 대한 애증과 향수를 여전히 공유하고 있습니다.
5. 역사의 아이러니
알제리아 피에 누아르의 역사는 제국주의 식민 정책이 빚어낸 뒤틀린 번영 속에서 피어났다가 민족 해방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난 이주민들의 비극적인 서사입니다.
조국이라 믿었던 프랑스에서는 외지인 취급을 받고 태어난 고향 알제리아에서는 침략자로 낙인찍혀야 했던 이들의 드라마틱한 운명은 역사발전에 따른 탈식민지화가 남긴 씁쓸하고도 깊은 상처로 남아있습니다.
한때 해외 여러 지역에 식민지를 갖고 있으면서 원주민들을 수탈하고 착취했고 또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하려 수많은 식민지 인력들을 본국으로 데려갔던 프랑스는 그 결과로 많은 무슬림 이민자들을 수용하게 되었고 이들 때문에 겪는 종교갈등과 테러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걸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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