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해협 통행료는 정당한가 - 이란과 미국의 갈등의 뿌리를 찾아서

[세계의 관심사]

지금까지 공해를 지나는 배가 통행료를 지불한적은 역사상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내야 할것 같습니다. 최근 미국과 이란간의 전쟁과 군사적 충돌이 세계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란이 어떻게 중동의 대표적인 반미 국가가 되었는지 그리고 중동의 거대 강국으로 부상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00년대 이후 이란이 걸어온 격동의 현대사를 파악해야 합니다.

석유의 발견부터 서구의 개입, 팔라비 왕조의 세속화 개혁과 1979년 이슬람 혁명에 이르기까지 이란 현대사의 흐름을 알아봅니다.


Tehran Iran
Tehran Iran

1. 20세기 초 석유 발견과 팔라비 왕조의 탄생

1900년대 초반 이란은 카자르 왕조(Qazar Dynasty)가 다스리고 있었으나 서구 열강의 이권 침탈로 국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습니다. 1908년 이란 땅에서 중동 최초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면서 이란의 운명은 급격하게 바뀌었습니다. 영국은 석유 개발권을 독점하기 위해 영국-이란 석유 회사를 설립했고 이란의 석유 이권을 사실상 독식했습니다.

팔라비 왕조의 시작

외세의 수탈과 혼란 속에서 1921년 군인 출신의 레자 샤 팔라비(Reza Shah Pahlavi)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는 1925년 카자르 왕조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국왕의 자리에 올라 팔라비 왕조(Pahlavi Dynasty)를 열었습니다. 

레자 샤는 국호를 그때까지 사용하던 "페르시아"를 버리고 "이란"으로 공식 변경하고 강도 높은 서구화와 현대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2. 모사덱의 석유 국유화와 미국의 쿠데타 개입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란 현대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1951년 민주적으로 선출된 모하마드 모사덱(Mohammad Mosaddegh) 총리의 등장입니다.

모사덱 총리는 영국이 독점하고 있던 이란의 석유자원을 몰수하여 이란 국가의 소유로 하는 석유국유화를 전격 시행했습니다. 이란 국민들은 자국의 주권을 되찾았다며 열광했습니다.

1953년 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

석유 이권을 빼앗긴 영국과 냉전 시기 이란의 친소련화를 우려한 미국은 비밀 공작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작스 작전입니다.
1953년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영국 정보국은 이란 군부를 부추겨 모사덱 총리 정부를 무력으로 뒤엎는 쿠데타를 성공시켰습니다. 민주 정부가 무너지고 국왕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에게 절대 권력이 집중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란 국민들의 가슴속에 미국에 대한 깊은 불신과 반미 감정을 뿌리내리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3. 백색혁명과 친미 팔라비 왕정의 독재

쿠데타로 권력을 되찾은 팔라비 국왕은 미국의 막강한 지원을 바탕으로 강력한 친미 서구화 정책인 백색혁명(White Revolution)을 추진했습니다.

서구식 현대화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하고 히잡착용 의무를 없앴으며 토지개혁과 교육및 의료 보건을 확대했습니다.
석유로 번돈을 경제발전에 투자하여 빨리 서구를 따라잡기 위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경제 성장의 그늘

1970년대 석유 파동으로 유가가 급상승하여 막대한 오일 머니가 유입되며 도시는 급격히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빈부격차가 극심해졌고 급속한 서구화로 전통적인 이슬람 성직자들과 보수층의 거센 반발을 샀습니다.

비밀경찰의 탄압 

팔라비 국왕은 비밀경찰 사바크(Savak)를 동원해 정치적 반대파와 언론인및 성직자들을 잔혹하게 고문하고 탄압했습니다.


4. 1979년 이슬람 혁명과 반미 국가로의 대전환

독재와 극심한 빈부격차 그리고 이슬람 전통의 파괴에 분노한 이란 대중은 마침내 폭발했습니다.
망명 중이던 이슬람 성직자 아야톨라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민중 시위가 전국적으로 번졌고 1979년 팔라비 국왕은 결국 해외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2,500년 넘게 이어지던 이란의 왕정 제도가 완전히 종말을 고한 순간이었습니다.

이란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귀국한 호메이니는 신권정치 체제인 이란 이슬람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신권정치란 대통령이 아닌 종교지도자가 최고의 의사결정을 하는 정치 방식입니다. 이를테면 조계종 종정이나 기독교 총연합회장이 대한민국의 최종 의사 결정권자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같은 해 11월 이란의 대학생 시위대가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을 점거하고 444일 동안 미국 외교관들을 인질로 잡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이란은 공식 외교관계를 완전히 끊게 되었고 이란은 중동의 대표적인 반미 국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5. 이란 이라크 전쟁과 핵개발을 둘러싼 갈등

이슬람 혁명 직후 이란은 또 한 번의 거대한 시련을 맞이했습니다.
1980년 이웃 나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이란의 혼란을 틈타 전격 침공하면서 이란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8년 동안 계속된 이 잔혹한 전쟁으로 양측에서 10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미국과 서방국가들은 이라크를 지원했고 이는 이란의 외교적 고립감을 심화시켰고 반미감정을 더욱 더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대의 핵개발과 미국과의 정면충돌

2000년대 들어 이란은 서방의 제재 속에서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과 국제사회는 강력한 경제 제재를 가했고 이란의 석유수출과 금융거래를 완전 봉쇄했습니다. 2015년 오바마정부 시절 핵합의(JCPOA)가 타결되며 잠시 평화기류가 흘렀으나 이후 미국의 파기와 제재 재개로 양국 관계는 다시 파국으로 치달았습니다.

결론적으로 1900년대 이후 이란의 현대사는 외세의 석유수탈에 대한 저항과 친미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슬람 신권정치의 탄생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과거 미국 CIA의 쿠데타 개입과 미국 대사관 인질사건으로 얽힌 역사적 앙금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2020년대 미국과 이란이 정면충돌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이란 공습

2026.2.28.미국이 이스라엘과 합동작전으로 이란을 공습하여 최고지도자를 포함한 지도부 다수를 제거하였고 미국은 온건한 지도부가 들어설것으로 기대했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 갔습니다.

이란은 세계경제의 아킬레스건인 석유수송로 호르무즈해협을 봉쇄하였습니다.
전쟁 6개월째인 현재도 개방되지 않고 있는데, 전쟁을 조기 종결하라는 미국내 여론에 몰린 트럼프 행정부가 호르무즈 해협 통제권을 이란에 넘겨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국제법상 공해의 항행은 무료라는 원칙을 깨고 공해를 지날때도 돈을 내야하는, 국제법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주인없는 바다를 항해할때도 돈을 내야하는 사상최초의 사례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란으로서는 그야말로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제2의 유전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산과 대마도(쓰시마) 사이의 바닷길을 지나는 모든 선박을 대상으로 한국정부가 통행료를 징수할수 있고 싱가포르앞의 말라카 해협을 지날때 싱가포르한테 통행료를 내야 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결국 이번 전쟁의 최후 승리자는 이란이 되고 패배자는 전세계가 될가능성이 큽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댓글로 편하게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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