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보다 앞서갔던 필리핀은 선진국이 될 수 있을까

Manila Beach
Manila Beach


오늘은 동남아시아로 눈을 돌려 필리핀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알아 보겠습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 필리핀은 일본 다음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발전된 국가중 하나였습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1인당 국민소득 80달러에 허덕이던 한국과 비교하면 필리핀은 아시아 각국이 부러워하던 근대화의 우등생이었습니다. 1960년 기준 1인당 GDP를 보면 필리핀 $270, 한국 $80로 3배 이상 부유했었습니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한국은 세계적인 선진 공업국으로 올라선 반면 필리핀은 여전히 중진국의 문턱조차 넘지 못한 채 극심한 빈부격차와 정체에 갇혀 있습니다. (2025년 기준 1인당 GDP 필리핀 $4,200, 한국 $36,000)

필리핀이 왜 몰락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뿌리깊은 봉건적 사회구조를 극복하고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을지 한번 분석해 보겠습니다.


1. 1960년대 필리핀의 황금기


1960년 전후 필리핀의 위상은 오늘날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미국의 식민 통치시기 엄청난 원조를 받으며 일찍이 영어 공용화 체계를 갖추었고 아시아 최고수준의 대학교육 시스템과 잘 정비된 근대 행정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 압도적인 소득: 당시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0달러를 웃돌며 한국의 3배에 달했습니다. 아시아에서 일본 바로 다음 가는 경제규모를 자랑했습니다.


  • 한국의 선망 대상: 필리핀 기술진이 서울에 와서 장충체육관을 지어주었다는 유명한 소문이 돌 정도로 당시 한국인들에게 필리핀은 마닐라의 번화한 빌딩숲과 선진문물을 가진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화려했던 겉모습은 건전한 제조업기반 위에 세워진 탑이 아니라 설탕과 목재등 천연자원 수출과 미국의 특혜성 원조에 기댄 모래성 같은 번영이었습니다.


2. 몰락의 방아쇠 마르코스 독재와 정실 자본주의


필리핀 경제가 구조적으로 추락하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1965년 집권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의 20년에 걸친 장기 계엄 독재였습니다.

마르코스 정권은 국가 주도의 건전한 산업화 대신 국가재정과 외채를 끌어들여 측근 재벌들에게 독점권을 몰아주는 악명 높은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를 자행했습니다.

설탕, 담배, 통신, 맥주등 국가 핵심산업의 이권이 대통령의 친인척과 기존의 거대 가문들에게 넘어가면서 기술혁신과 생산성향상은 완전히 실종되었습니다.

여기에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국부유출과 부정부패로 인해 1980년대초 외채 위기가 터지면서 필리핀 경제는 사실상 국가부도 상태에 빠졌고 아시아의 용으로 알려졌던 한국, 대만, 싱가포르의 뒤편으로 영원히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3. 선진국 도약을 구조적으로 가로막는 장애물


사회구조상 선진국으로의 도약이 어렵다는 진단은 경제학계와 사회학계에서도 매우 지배적으로 동의하는 현실적인 평가입니다.

필리핀 사회의 기저에는 근대 국가로의 전환을 가로막는 3가지 거대한 구조적 장벽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진 토지 과두제와 그들의 정치 독점


필리핀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민주주의 정부가 아니라 수백년전 스페인 식민지배 시절 형성된 대토지 소유주(Hacienda, 하시엔다)에서 출발한 약 100여개 가문의 과두제(Oligarchy)입니다. 이들 대농장 소유주의 후손들 1%가 전국 토지의 22%를 소유하고 있으며 상위 10%가 전국 토지의 60%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국회의원, 주지사, 시장 자리를 대를 이어 세습하며 지방 권력의 80% 이상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Aquino가문, Roxas가문, Arroyo가문, Marcos가문, Ayala가문등이 있습니다.

한국과 대만이 해방 직후 과감한 토지개혁을 통해 지주계급을 해체하고 교육을 바탕으로한 평등한 인적 자원을 형성했던 반면 필리핀은 지주계급이 의회를 장악한 탓에 토지개혁에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부의 세습과 토지의 대물림이 정치권력과 결탁해 새로운 경쟁세력과 혁신기업의 등장을 원천 차단하고 있습니다.

제조업 부재와 넘을수 없는 중진국 함정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사다리는 농업 인구를 흡수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제조업 육성입니다.

그러나 필리핀은 제조업을 건너뛴채 콜센터와 같은 단순 서비스업(BPO, Business Process Outsourcing)과 건설업으로 바로 넘어갔습니다. 고질적인 전력 부족, 비싼 전기 요금, 7000개가 넘는 섬으로 갈라진 열악한 물류 교통 인프라, 그리고 외자 기업에 대한 까다로운 규제 때문에 글로벌 제조업 공장들은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탄탄한 제조업 기반이 없이는 결코 1인당 GDP 2만달러 이상의 고소득 국가로 진입할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해외송금 경제가 만든 기형적 경제구조


현재 필리핀 인구 1억 1천만명중 약 10%인 1천만명 이상이 가정부, 간호사, 선원, 건설 노동자로 전 세계에 나가 일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고국으로 보내는 해외노동자 송금액(Overseas Filipino Workers Remittances)은 필리핀 전체 GDP의 약 10%를 차지합니다.

이 막대한 달러 송금은 국내소비를 지탱하고 빈곤층의 굶주림을 막아주는 안전판 역할을 하지만 역설적으로 국가 경제에는 치명적인 독약이 되었습니다.

국민들이 해외에서 번 돈으로 국내 쇼핑몰에서 소비만 하다 보니 정부와 정치 엘리트들은 국내에 양질의 제조업 일자리를 만들고 산업 개혁을 추진할 절박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안일한 구조의 악순환에 빠져버렸습니다.


4. 풍부한 청년층 인구와 핀테크(Fintech) 성장의 허상


물론 필리핀 경제가 완전히 파탄난 것은 아닙니다. 최근 수년간 연 5%에서 6% 안팎의 견조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주로 해외송금 자산의 국내소비, 콜센터 같은 BPO 산업의 성장, 인구 1억 이상의 내수시장 소비에 기인하지만 그래도 다음과 같은 긍정적 요소는 있습니다.

  • 풍부한 젊은 인구: 필리핀 인구의 평균 연령이 25세에 불과하여 동아시아 선진국들이 겪고 있는 급격한 고령화 위기에서 자유롭습니다.


  • 디지털 금융의 확산: 영어구사 능력과 모바일 보급을 바탕으로한 전자결제등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기존의 금융시스템이 너무나 낙후되어 있어서 그것을 건너뛰고 바로 digital 금융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경제성장은 국내 소비의 증가등에 기인한 것으로 경제의 질적 도약이라기 보다는 인구증가에 따른 내수시장의 양적 팽창에 따른 부수적인 현상에 가깝습니다.

중요한것은 제조업의 부재입니다. 
현재의 기형적인 과두제 정치체제와 토지독점 그리고 제대로 된 제조업이 없는 해외송금 의존형 경제구조를 획기적으로 뜯어 고치지 않는한 선진국으로의 도약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진단이 가장 정확합니다.

정치 권력과 자본을 독점한 소수 가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스스로 내려놓을 요인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마닐라의 마천루는 대다수 국민들의 만성적 빈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씁쓸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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