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사] 영하 40도 혹한속의 혈전 장진호 전투와 흥남항 철수
1950년 겨울 한반도 북부의 험준한 개마고원 장진호 일대에서 세계전쟁 역사상 가장 처절하고 가혹했던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바로 미해병 제1사단을 주축으로한 미군과 압도적인 병력으로 포위망을 좁혀온 중공군 제9병단이 맞붙은 장진호 전투(Battle of Chosin Reservoir)입니다.
참고로 영어표기는 장진호를 Chosin Reservoir라 하는데 Chosin은 장진의 일본어 발음으로 그 당시 미군들이 사용한 한반도 지도에 그렇게 표시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며 Reservoir는 자연호수가 아닌 인공 저수지였기 때문입니다.
극한의 추위 영하 40도의 살인적인 혹한과 10배에 달하는 적의 포위망 속에서도 불굴의 투혼으로 적의 공세를 꺾고 기적 같은 포위망 돌파를 이뤄낸 혈전의 전말과 그 역사적 의미를 알아 보겠습니다.
1. 압록강 진격과 중공군의 은밀한 포위망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후 서울을 수복하고 38도선을 돌파한 국군과 유엔군은 크리스마스 전까지 전쟁을 끝내겠다는 희망을 품고 북진을 거듭했습니다.
미 제10군단 예하 미해병 제1사단은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험준한 산악지대인 장진호 방면으로 진격했습니다. 그러나 연합군은 중국의 대규모 참전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1950년 10월부터 정예 중공군 제9병단 소속 12만명의 대병력이 미군의 정찰망을 피해 야간 행군으로 은밀히 한반도로 잠입해 산악 지대에 매복을 완료한 상태였습니다.
1950년 11월 27일 장진호의 유담리와 하갈우리 일대로 진격하던 미 해병대 1만 5,000여 명은 수적으로 약 10배에 달하는 중공군의 기습적인 포위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2. 영하 40도의 살인적인 혹한속 적과의 싸움
장진호 전선에서 병사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중공군의 피리와 나팔 소리보다도 뼈를 깎는 듯한 시베리아발 혹한이었습니다.
낮에는 영하 20도에서 30도, 밤이 되면 체감온도가 영하 40도 이하로 곤두박질치는 극한의 환경이었습니다.
무기와 장비의 동결: 총기 윤활유가 얼어붙어 기관총과 소총의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았고 박격포의 완충 장치가 얼어 터졌습니다. 차량의 시동을 끄면 다시는 엔진이 걸리지 않아 24시간 내내 시동을 켜두어야 했습니다.
의료 시스템의 마비: 부상병에게 주사할 모르핀 앰플이 꽁꽁 얼어붙어 위생병들이 입에 물고 녹여가며 투약해야 했고 혈장 주사선마저 얼었습니다.
동상의 공포: 땀을 흘리면 그 즉시 얼어붙어 발가락과 손가락이 썩어 들어갔으며 통조림은 돌덩이처럼 단단해져 불에 녹이지 않고는 먹을 수 없었습니다.
양측 병사들은 적의 총탄을 맞기도 전에 살인적인 동상과 저체온증으로 수없이 쓰러져 갔습니다.
3. 후퇴가 아니라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이다
적의 겹겹 포위망에 갇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 종군기자들이 철수 여부를 묻자 미 해병 제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Oliver Smith)소장은 전쟁사에 길이 남을 명언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사방이 완전히 적으로 둘러싸인 상태였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남쪽 퇴각로를 뚫는것 자체가 적진지를 정면으로 격파해야 하는 치열한 돌파 작전이었습니다.
미 해병대는 사방에서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는 인해전술의 중공군을 상대로 강력한 항공 근접 지원(CAS)과 포병 화력을 결합하여 침착하게 진지를 사수했습니다.
특히 전략적 요충지였던 덕동고개 전투에서는 폭스 중대의 윌리엄 바버 대위와 대원들이 5일 밤낮 동안 고립된 상태에서 혹한과 수천 명의 중공군 공격을 버텨내며 아군의 주력 철수 통로를 목숨걸고 지켜냈습니다.
4. 수문교의 기적과 흥남으로의 대탈출
퇴각로의 마지막 관문이었던 황초령 협곡의 수문교가 중공군의 세 번째 폭파로 완전히 끊기며 병력과 차량이 낭떠러지 앞에 갇히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다리가 없으면 전차와 차량 및 수천 명의 부상병을 버리고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미군은 일본에서 급히 조달한 철제 트레드웨이 교량 상판 8개를 C-119 대형 수송기를 동원해 낙하산으로 전선에 투하하는 유례없는 공중 투하작전을 감행했습니다.
공병대는 빙판길과 혹한 속에서 기적적으로 다리를 복구해 냈고 미해병대와 육군부대는 단 한 대의 전차와 중장비도 적에게 넘겨주지 않은채 부상병들을 전원 수송하며 함흥과 흥남 해안가로 빠져나왔습니다.
5. 흥남 철수작전과 10만 피난민의 생명을 구한 승리
장진호 전투의 결과는 단순한 철수 작전의 성공을 넘어 전쟁 전체의 판도를 바꾼 거대한 전략적 승리였습니다.
중공군 최정예 제9병단의 궤멸: 미해병대를 섬멸하려던 중공군 제9병단은 미군의 강력한 화력과 혹한으로 인해 52,000명에 달하는 막대한 사상자와 동상자를 내며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한편 미군도 18,000명의 사상자를 기록 했습니다. 그 결과 중공군은 그해 겨울 중부전선으로 추가 병력을 투입하지 못하고 부대를 전면 재편해야 했습니다.
흥남 철수작전의 발판 마련: 미 해병대가 중공군 주력부대의 발을 2주 동안 묶어두고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흥남부두에서 군인 10만명과 피난민 10만여 명을 안전하게 남쪽으로 탈출시키는 역사적인 흥남철수의 기적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장진호 전투는 혹독한 영하 40도의 자연재해와 10배에 달하는 적의 포위망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은 군인들의 강철같은 군기, 결속력, 희생정신이 빚어낸 현대 군사역사상 가장 위대한 포위 돌파 작전이었습니다.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낯선 이국땅 얼어붙은 산악지대에서 피를 흘렸던 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은 오늘날 굳건한 한미동맹의 가장 단단한 뿌리이자 잊을수 없는 전쟁사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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